耕海 김종길(010-5341-8465, jkihm@hanmail.net)

▲ 耕海 김종길

애가 제 애 이름을 지어달란다

 

소꿉장난 같은 이야기다.

초등학교 2학년 여덟 살 난 셋째 손녀 다함이가 이 할아버지에게 자기 애 이름을 지어 달란다. 엉뚱하다. 20년쯤 이후에나 아이를 낳을 터인데. 이를 두고 기상천외奇想天外라는 건가? 아니면 샘터에서 숭늉 달라는 건가? 하기야 타임머신을 타면 20년쯤은 순식간이다. 할아버지가 여든을 훨씬 넘어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니 자기 애 이름을 미리 받아놓으려는 건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린애가 어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엄마와 아빠와 언니들이 하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만 이름을 짓는 걸로 아는가보다. 아무튼 다함이는 별난 아이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유치원에 다니던 애가 이메일을 보내와 깜작 놀랐다.

『Dear Grandpa!
I miss you very much. I wish I could go to Korea.
I love you and Grandma.
Love, Daham』

사랑하는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너무 보고 싶어요. 한국에 갔으면 좋겠어요.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해요.
다함 올림

기특해 이메일을 읽고 또 읽었다. 어린것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보고 싶었으면… 짧은 이메일이지만 그리움과 사랑이 묻어있어 가슴이 저렸다.

다함이가 학교에서 머리핀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같은 반 친구 머리에 그 머리핀이 꽂혀있었다. 내 것이라고 달라고 하니까 자기 것이라고 우겼다. 그 애를 교무실로 데려가 담임선생님께 설명을 드리고 돌려받았다.

어린 것이 과묵하다. 하지만 언니들이 부당하면 그대로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 해서라도 바로잡는다. 기타도 잘 친다. 엄마 생일파티에서 기타를 치며 ‘Happy birthday to you’ 생일축하 노래를 멋들어지게 불러 엄마를 즐겁게 해 주었단다.

아무리 복잡한 퍼즐이라도 머리를 기우뚱 거리며 맞추어낸다. 언니들이 건축가가 되라고 하면 자기를 놀리는 것으로 알고 발끈한다. 손자가 없는 우리 집안에 장손 역할을 해 가문의 영광을 안겨주길 기대한다.

내가 미국에 갔을 때 손녀 셋을 데리고 성당엘 갔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 정문 계단에서 노는데 백인부인이 동양인인 우리에게 관심이 있었던지 다가와 손녀들에게 이름을 물었다. 첫째가 “다슬 Daseul Kim입니다”라고 답했다. 둘째는 다해 Dahae Kim, 셋째는 다함 Daham Kim 이라고 차례로 답했다. 부인이 “Kim은 성이고 이름 뜻은 뭐야”고 물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가 이름을 지어주셨으니 할아버지께 물어보시라고 했다.

“한국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중국 문자인 한자漢字로 이름을 짓는데 나는 손녀들의 이름을 한국 고유문자인 「한글」로 지어주었습니다”고 설명하고서 “다슬 Daseul은 스스로를 다스린다(self control), 다해 Dahae는 최선을 다한다(do best), 다함 Daham은 다함께(all together)”라고 이름 뜻을 풀이했다. 부인이 듣고서 이름 뜻이 너무 좋다면서 wonderful을 연발했다.

52년 전, 1967년에 첫딸을 가졌다. 이름을 한글로 짓고서 호적에 올리려고 시골 고향에 갔다. 호적계 주임이 한글로는 호적이 안 된다고 거부했다. 아무리 사정을 해도 막무가내였다. 하는 수 없어 실례實例를 들어 맞섰다. 서울대학 국문학교수 집안으로 출가한 내 생질녀 아이들이 시내, 시원, 한송이란 한글 이름으로 호적을 했으니 조회해보라고 다잡아 「이랑」이란 이름으로 가까스로 호적을 마쳤다.

소가 쟁기질을 하면 이랑이 생긴다. 이랑에 씨앗을 뿌려 추수하듯 여자 이름으로 제격이다. 그리고 배가 선미에 백파트랙을 이루며 먼 바다로 떠난다. 나는 이를 이랑이라 부른다. 바다에 그려진 이랑에 낭만을 느낀다. 또한 이랑은 받침이 있는 체언에 붙어 두 개 이상의 사물을 같은 자격으로 열거할 때 쓰는 접속조사다. 예를 들면 떡이랑 밥이랑 과일이랑…

1969년 아들을 낳았다. 「한결」이라고 이름을 지어줬다. 변함없이 한결같이 노력하여 다른 사람보다 한결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내 염원이다. 한결이는 이름대로 한결같이 공부하여 학문의 경지가 한결 드높다.

한결이가 낳은 딸 셋이 다슬, 다해, 다함이다. 아들과 딸 둘, 손녀 셋, 모두 다섯을 한글로 이름을 지어주어 나는 한글사랑을 실천했다. 손녀 셋이 올곧게 스스로를 잘 다스리고 다함께 힘을 모아 최선을 다하면 아무리 어려운 역경이라도 딛고 일어나리라 믿는다. 가계家系가 달라 외손녀 둘에게 한글이름을 못 지어준 게 아쉽다.

나는 다함이가 원하는 대로 한글이름을 여섯 개쯤 지어 봉인하여 한결에게 유서처럼 맡겨 두련다. 먼 훗날 세 손녀가 내 증손을 낳으면 그 한글이름으로 불러지길 바란다.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