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번창, 日미즈시마항 최대 선사 등극

▲ 박종규 회장

P기업으로부터 주식을 완전히 돌려받은 뒤에도 우리의 사업은 순풍에 돛을 단 듯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갔다. 마침 정부에서는 중화학공업 육성 정책의 일환으로 울산과 여천 등지의 석유화학 공업단지에 대단위로 투자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회사 선박들은 이와 관련된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울산, 마산, 진해 등을 분주하게 오갔다.

수송 화물이 점차 늘어나면서 우리 회사의 선박 척수와 선복량도 계속 증가했다. 제1케미캐리호 1척으로 운항을 시작한 것이 1974년에는 운항선대가 9척, 7367만gt로 늘었고, 1978년에는 27척, 2만 8099gt까지 증가했다. 물론 운송하는 선박 척수가 늘어나면서 매출액도 놀라울 정도로 신장했다.

사업이 번창하면서 우리 회사(당시는 사명이 ‘한국케미컬해운’으로 바뀌어 있었다)의 선박이 일본에 기항하는 횟수가 연간 1000번을 넘어서게 됐다. 하루 평균 3척 정도가 일본 항구에 정박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특히 석유화학 단지인 미즈시마항에는 육각형 로고에 C자를 새겨 넣은 우리 회사 배의 펀넬마크를 언제든지 볼 수가 있었다. 미즈시미항에 거의 매일같이 우리 배가 들락거리자 그 일대의 사람들은 우리 회사가 제일 큰 해운회사인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만큼 사업은 계속해서 번창해나갔던 것이다.

1976년과 1977년에는 중형 케미컬선을 도입해 동남아항로에도 진출하게 됐다. 1976년에 도입한 5500dwt 영케미캐리호와 1977년에 도입한 역시 5500dwt의 벤추라케미캐리호는 모두 신조선이었다. 당초에는 영케미캐리호 한척만 투입할 생각이었으나 수송거리가 길어서 월 1항차밖에 수송하지를 못했다. 그래서 월 2항차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한 척을 더 도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선박들은 탱크가 여러 개로 구분돼 있는 파슬탱커인데다가 탱크 내부가 스테인리스여서 두 척의 건조비가 800만 달러나 됐다. 이 건조비는 IBRD차관과 일본 엔차관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선가상환이 부담됐지만 동남아 시장이 확대될 것이라는 판단에서 과감하게 도입을 추진했다.

▲  1976년에 최초로 신조 도입한 5500dwt급 영케미캐리호 진수식에서 필자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VCM 독점 수송, 하지만 골치만 아파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케미컬화물을 운송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일부 특수화물은 우리 회사가 거의 독점적으로 수송하게 됐다. 하지만 이러한 독점적인 운송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1971년부터 시작된 PVC원료인 VCM은 우리가 독점적으로 수송하면서 하주들끼리 경쟁이 심화돼 아주 골치 아픈 일이 많았다. 제각기 자기 화물을 먼저 실어달라고 나에게 로비를 해 오는 것이었다. 당시 진해의 한국화섬, 군산의 우풍화학, 울산의 공영화학 등이 PVC 생산업체였는데 피나는 경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 화물을 우선적으로 수송하기 위해 치열한 로비활동을 벌였다.

나는 독점적인 지위를 이용해 편익을 취하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한 회사에게 특혜를 줄 경우 다른 회사들은 궁지에 몰릴 수 있으므로 공평하게 실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선청선적(先請先積) 원칙을 공표했다. 먼저 선적을 의뢰한 회사의 화물을 먼저 실어준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이러한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도 결코 쉽지가 않았다. 1971년 여름, 한 회사는 수송선사를 매수해 시장 전체를 독점해 보겠다는 생각에서 나에게 거액의 뇌물을 제공할 터이니 대신에 자신들에게 선적 우선권을 달라고 요구해 왔다. 당시 나는 일본에 출장 중이었는데, 그 회사의 중역이 호텔 방으로 나를 찾아와서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물론 나는 일언지하에 거절해 버렸다. “두 회사가 망하게 될 것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당신 회사에 수송 우선권을 줄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거절을 하면서 그 회사 중역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이 사건 이후 중역들을 불러 모아 놓고 로비를 받았던 사실을 털어놓으면서 “선청선적의 원칙은 지켜나가되 거기에도 예외는 있다”고 선언했다. 즉 ‘선청선적’이 원칙이지만 “어떤 회사이건 간에 공장에 원료가 떨어지게 되면 최우선적으로 실어준다”는 새로운 원칙을 발표한 것이다. 거액 뇌물 제의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약한 화주를 보호하겠다는 나의 생각이 더욱 굳건해진 셈이다.

다행히 그 후 얼마 있다가 불황이 심화되면서 3사가 한 회사로 통합됐고, 그에 따라 우리들의 이 같은 고민은 서서히 사라지게 됐다.

선원들 화물창 청소에 엄청나게 고생

회사가 초창기부터 날개를 달은 듯이 성장해 나갔지만, 처음 해보는 사업이다 보니 어려운 점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 회사는 해운업종 중에 케미컬화물과 가스 등의 특수한 화물만을 취급하는 회사였으니 우리는 해운의 한 분야를 개척해 나가는 선구자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을 우리가 하나하나 접하며 길을 만들어 나가야 했으니, 그에 따른 시행착오와 어려움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울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독성이 있는 액체화물을 싣고 내리면서 다음 항차의 선적에 대비해 화물창을 깨끗이 청소해야 했던 선원들의 노고는 정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케미컬선의 화물창을 클리닝하려면 물이나 알코올 같은 액체를 고온의 증기상태로 만들어 청소용제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업초기에는 선박에 자동 클리닝 설비가 장착돼 있지 않았기 때문에 선원들이 일일이 수작업으로 청소를 하느라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어느 날 탱크 안에서 청소를 하던 인부들이 화물의 냄새에 취해 갑자기 노래를 부르고 괴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다. 선장이 이들에게 위험하니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를 쳐도 이들은 이 말을 듣지 않고 노래만 불러냈다. 결국 억지로 이들을 끌어내고 다른 인부들로 교체해 조금씩 조금씩 작업할 수밖에 없었다. 자동 클리닝 장비도 설치돼 있지 않던 그 옛날에 선원들의 고생은 이루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이렇게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사업 초기부터 위험 화물만을 취급해 온 우리 회사에서 선박사고가 아주 적었다는 것은 우리의 자랑거리다. 사업 초기에 주로 중고선을 운항했음에도 안전운항 실적을 달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선원들의 자질이 높고 훈련도 잘 돼 있었고, 안전관리 의식도 높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아직도 우리 회사가 화주들로부터 큰 신뢰를 얻고 있는 것도 이런데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한국해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