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황예측 제대로 하는 것이 사업성공 비결

▲ 박종규 회장

뒤늦게 밝혀진 사실이지만, 이 계약은 도긴리스의 고토 사장의 결단이 없었다면 하마터면 무산될 뻔 했다. 도긴리스가 자금지원에 대한 계획을 모회사인 동경은행에 올렸지만 계약 당일까지도 승인이 나지를 않았던 것이다. 모회사의 승인도 없는 상태에서 고토 사장이 책임을 지겠다며 업무 담당자인 다카시마 이사에게 “홍콩 가서 계약서에 사인하고 오라”고 지시를 한 것이었다. 고토사장의 결단으로 이 계약이 성사됐던 것이다.

우리들이 분석했던 시장 전망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들어맞았다. 89년 9월경부터 대형가스선 용선료가 월 45만달러에서 100만달러까지 뛰어올랐다. 건조를 시작한지 채 6개월도 안돼 용선료가 2배 이상으로 폭등한 것이니, 그 정도의 용선료 수준이라면 운항원가와 선가 상환비용을 제하고도 상당한 이익을 남길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 해 후반에 우리는 영국의 한 회사와 월 97만 5000달러에 5년간 용선 계약을 체결했다. 이 용선계약은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그로 인해 우리 회사는 탄탄한 재정기반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지금 와서 다시 생각해 보면, 누구나 하는 방식대로 장기용선계약을 맺은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자금지원을 받고 건조계약을 체결했다면 이렇게 큰 이익을 발생시킬 수는 없었을 것이다. 분명 장기용선계약은 형편없는 낮은 가격에 체결됐을 것이고, 그렇다면 수익을 크게 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도긴리스의 다카시마 이사와 고토 사장의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 우리 회사가 발전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주춧돌이 됐던 셈이다.

결국, 우리가 처음 해보는 대형가스선 사업에서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요인은 거금 10만달러까지 들여가면서 애썼던 시장에 대한 철저한 분석과 연구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시황에 대한 분석과 연구에는 내가 대한해운공사 기획실의 선박도입반에서 일하면서 쌓은 노하우가 큰 힘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다. 해운회사들은 많은 연구비를 투입해서라도 장시간의 시황 예측을 제대로 하는 것이 사업을 큰 성공으로 이끈다는 사실을 꼭 명심했으면 한다.

“차라리 디폴트 선언하겠다” 배수의 진 치다

대형가스선 신조의 1차선 격인 가스로망호의 성공에 용기를 얻은 우리는 곧바로 제2차선의 건조에 나섰다. 대형 LPG시장이 계속 좋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91년 가을에 미쓰비시중공업과 선가 7000만달러, 엔화로 91억엔의 2차선 건조계약을 체결했다. 이 배가 바로 기적을 불러일으키라는 의미에서 작명을 했던 ‘가스미러클(Gas Miracle)’호이다. 가스미러클호는 결과적으로는 정말 기적을 일으켰지만, 그 과정은 순탄치 않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중소형선사들의 한결같은 문제점은 신조선을 건조하는데 있어서 선박금융이 너무나 어렵다는 점이다. 가스미러클호도 선가 7000만원을 마련할 방법이 딱히 없었다. 당시에 자체적으로의 조달할 수 있는 돈은 계약금의 15%에 해당하는 1000만 달러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돈은 자체자금과 대출을 통해 마련했지만, 나머지 선가 6000만달러를 마련할 방도가 없었다. 일반적인 경우는 선가 6000만달러는 화주들과의 장기용선계약을 담보해 금융기관에서 빌려야 하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92년 봄부터 시황이 나빠지기 시작하자 선뜻 장기용선계약을 하려고 나서는 화주가 없었던 것이다.

선박 진수는 92년 6월말로 잡아서 추진을 하고 있는데, 5월말이 다 되도록 용선계약을 체결할 화주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쓰비시중공업측은 우리의 자금 사정이 여의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는 선가의 10%만 손해를 보고 리세일 할 것을 권장했다. 700만달러를 손해보고 리세일 해서 300만달러라도 건지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차라리 디폴트를 선언하면 했지 리세일은 절대로 안 하겠습니다”라고 내가 강하게 반발하자, 미쓰비시중공업측은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리세일을 하게 되면 700만달러만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용도에 완전히 금이 가는 것이지만, 차라리 계약 불이행을 하게 되면 대표이사인 내가 책임지고 물러나고 새로운 경영진이 회사를 맡아서 끌고 가면 되기 때문에 회사 신용도에 타격이 덜하다는 판단이 섰다. 다행히도 비쓰비시중공업은 진수대금 납입 의무기간을 6개월간 연장해주었다.

대금 납입기한이 늘어나자 정말 기적처럼 시황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이런 좋은 흐름을 타고 10월에는 유공가스(현 SK가스)와 3년간 장기용선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다. 또한 그 용선계약을 바탕으로 일본의 ‘오릭스리스’에서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었으며, 그 결과 가스미러클호는 92년 12월에 우리의 손에 인도됐다. 좀처럼 믿기 어려운 기적 같은 일이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여기서도 나는 시황 분석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내가 비쓰비시측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배수의 진을 칠 수 있었던 것은 늦가을쯤에는 시황이 다시 좋아질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버티기만 하면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스미러클의 선가 91억엔은 제1차선인 가스로망호의 선가 보다 무려 17억엔이나 비싼 선박으로, 사실은 오기로 잘못 발주한 선박이라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이같은 선가는 미쓰비시중공업의 상술이 성공한 케이스라고도 할 수 있다.

“단발 계약 안한다” 미쓰비시의 뛰어난 상술

우리가 최초의 신조 대형가스선인 가스로망호를 비쓰비시중공업에서 건조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회사와 연관이 많았던 유요해운(雄洋海運)이 옵션으로 잡고 있던 선석을 양보해준 덕분이다. 88년 11월 나는 니쇼이와이의 소개로 미쓰비시중공업의 오구마(大熊) 영업부장을 만나서 신조선 상담을 했다. 그러나 처음 만난 그는 대뜸 “한국 선주로부터 주문을 받을 수 없습니다”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한국조선공업협회와 일본조선공업협회 사이에 자국 배는 자국에서 짓도록 하자는 신사협정 같은 것이 맺어져 있어서 일본 조선소들은 한국선주로부터 수주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우리 조선소들은 가스선을 지을 수 있는 실력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발주할 수밖에 없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 문제는 일본의 파이낸서가 선주가 되고 우리 회사는 용선자가 돼 선주를 대리해 용선자가 발주하는 방식으로 추진하기로 해 일단 발주는 할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는 막상 건조할 도크가 없었다. 그런데 또한 다행으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던 유요해운이 이미 미쓰비시에서 한척을 건조하고 있었고 한척은 옵션으로 잡고 있는 상태였다. 고맙게도 유요해운은 옵션을 우리에게 넘겨줬던 것이다.

이렇게 간신히 미쓰비시에서 대형가스선(가스로망호)을 신조할 수 있게 됐으며, 더구나 선가도 우리가 요구한 가격과 근사하게 74억엔에 지을 수가 있었다. 당시 오구마 영업부장은 우리에게 “원하는 가격(선가)을 말씀해 주시면 거기에 맞추어 드리겠다”라고 했고, 우리는 72억엔을 요구했지만 2억엔을 올린 74억엔에 서로 합의를 하게 된 것이다. 오구마 부장은 “우리는 한번 거래로 끝나는 고객과는 거래를 하지 말자는 주의입니다”라고 말하며 조선소와 선주는 공생관계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러나 그 후에 선가는 올라가서 우리가 2차선인 가스미러클호를 발주할 때 쯤에는 90억엔대가 됐다. 그래서 미쓰비시측이 91억엔의 선가를 제시했을 때 나는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한 번 거래를 하고 끝나는 고객이 되지 않겠다’는 자존심 같은 것 때문에 비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쿨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 얘기했던 대로 시황이 떨어지면서 용선계약을 해주는 화주가 없어서 자금 동원에 애를 먹다가 92년 10월에 가서야 유공가스와 계약을 맺어 일본 오릭스리스의 자금을 빌려 선박대금을 지불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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