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병 경영학 박사(한국국제상학회 이사,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팀장)

▲ 이기병 박사(lgb1461@naver.com)

‘동양의 하와이’라고 불리는 섬이 있다. 섬의 크기는 타이완 보다 조금 작다. 중국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으며 아시아 최대 면세점도 있다. 중국에서는 귀양지로 악명 높았던 섬이기도 하다. 바로 하이난(海南)이다. 하이난은 북송 때 최고 문장가 겸 중국의 대표적 요리 동파육(東坡肉)을 만든 소동파(蘇東坡)가 유배됐던 섬으로 올해 보아오(博鰲) 아시아 경제 포럼이 개최되기도 했다.

이렇게 유명한 하이난에 지금 중국 최초의 자유무역항이 건설되고 있다. 1980년 경제특구 개방, 2013년 자유무역 시험구 설치, 2018년 자유무역항 건설로 이어지는 중국 대외 개방정책 변화의 한 축이 하이난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일대일로의 해상 실크로드 거점지이자 중국 본토와 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이 하이난이 자유무역항으로 선정된 주요 배경이다. 하이난에 자유무역항을 건설해 자유무역의 기치를 내세우고 대외개방 확대를 표방하면서 중국의 서비스 무역 적자를 축소시키겠다게 중국의 의도다.

비관세인 자유무역항이 건설되면 많은 선박들이 정박해 하역·중계를 통관절차 필요없이 진행할 수 있다. 중국은 하이난항에 기존 자유무역항인 싱가포르·홍콩·함부르크·두바이 보다 더 많은 개방도와 자유화를 갖추도록 해 세계 최대 무역항으로서 경쟁력 확보를 염두에 두고 있다.

관광과 농업이 주요 산업이고 관광객이 오히려 손님일 수 있는, 원숭이들이 더 많은 하이난에서 변변한 인재, 인프라, 자본 없이 해양 굴기의 거점을 만들 수 있을지 아니면 잘 꾸며 놓은 섬으로 남을지 자못 궁금하다.

이처럼 유명한 관광지이자 중국 최초 자유무역항 건설이 추진되고 있는 하이난은 사실 우리 민족에게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중·일 전쟁 때 일본이 하이난 섬을 점령했다. 1943년부터 일본은 ‘조선보국대’ 또는 ‘남방파견보국대’ 이름으로 조선인들을 하이난 섬에 강제동원했다. 조선인 2천 여명을 각종 도로, 터널공사, 철광산 노무자 등으로 노역을 시켰다. 1945년 4월 하이난이 연합군에 점령당하자 일본군은 4단으로 땅을 파서 조선인 1300여명을 생매장으로 대량학살했다.

이 현장이 천인갱(千人坑)이다. 하이난 삼아시 남정촌(南丁村, 조선촌)에 위치하고 있다. 본디삼라이촌(三羅二村)이란 동네 이름으로 불리던 곳이었다. 일본군이 철수한 후에도 가끔씩 귀신이 나타나고 원혼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등 동네가 어수선해지자 마을 사람들이 ‘조선촌(朝鮮村)’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이곳에서 며칠 전 광복절을 앞두고 추모회 주최로 천인갱 희생자 추모제가 개최될 예정이었으나 중국 공안의 반대로 무산됐다. 유족, 정부 관계자, 필자가 몸담고 있는 기관 등 약 70명이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한·일 경제전쟁과 홍콩 시위 등의 영향으로 추도식 행사가 불허됐다.

현재 발굴된 유골 130여구 중 일부를 제외한 119명의 유골을 항아리에 넣어 영락재(迎樂齎)건물 납골당에 보관하고 있다. 현지 한국 사업가가 추모관을 짓고 부지를 관리하고 표지판 설치 등 사비를 통한 헌신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보존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한국 최초의 유골 봉환은 백범 김구 선생이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의 실존 인물인 독립운동가 박열 선생을 통해 이봉창, 윤봉길 의사를 효창공원에 모신 것이 처음이었다.

곧 74주년 광복절이다. 그동안 일제강제동원 피해·희생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등 아픈 과거사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관심은 광복절 주간에 바겐세일하듯 늘 이때만 제주 은갈치처럼 반짝반짝했다.

이제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고 긴 호홉으로 좀 가까이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중국 CCTV 채널을 돌려보면 약방에 감초처럼 방영되는 드라마가 있다. 항일 전쟁이다. 왜? 시청률이 높아서 일까?

그들은 영국 수상 처칠이 말한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단기적인 경제적 이익보다 한국 사회 전반적으로 사회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식 변화가 필요하다. 어떻게 변할까?

첫째, 일본·남태평양·러시아 등지에 끌려가서 희생된 우리 조상들의 유해를 좀 모셔오자. 함부로 버려질 분들이 아니다. 일본은 12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 유해를 발굴·조사하기 위해 미국과 협력하며 특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일본에 사죄와 배상을 말하면서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자. 강제동원 유족지원·연구·조사 사업 등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 있어 국가 예산 투입 등의 적극적 지원이 필요하다. 국민적 합의를 통한 사회적 공감이 확대되기를 간절히 고대한다.

태평양 전쟁지역 중심으로 세계 각국의 어느 땅 위, 어느 하늘 아래 우리 선조들의 원혼이 울고 계신다. 이분들의 ‘인간의 최후’를 가볍게 보지 말자. 내가 누군가를 버림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둘째, 우리끼리 피 튀기지 말자. 협력업체 납품단가 후려치고 경쟁업체와 국내에서 고소·고발 남발하며 피 튀기게 싸우지 말자. 4차 산업의 AI시대는 소통하고 공감하고 협력해야 생존할 수 있다. 해운·물류업도 국내외적으로 동맹을 확대해야 해운강국의 위상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소통이 부족하면 고통이 따른다. 인간은 동물 중 유일하게 혼자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

우리끼리는 피를 나누는 헌혈을 하자. 상생하고 협력해 사회·경제적으로 혁신클러스트를 많이 조성하자. 대기업-중소기업, 화주-해운사 등 다채로운 분야에서 합종연횡 협업으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자는 말이다.

셋째, 잘 연계해 뭉치면서 고통도 감수하자. 제조의 시대에는 큰놈이 작은 놈을 먹고 인터넷 시대에는 빠른 놈이 느린 놈을 잡았다. AI시대에는 친구 많고 연계성이 좋아 이를 통해 잘 뭉치는 놈이 나머지 모든 놈을 먹는다. AI 선도 기업들의 공통적 특성이 그렇다. 외부 파트너와의 협력적 관계를 맺어 생태계 구축을 잘한다. 부족한 부분은 M&A를 통해 미래 먹거리를 보충한다. 구글의 경우 이러한 비용으로 50억불 이상을 쏟아 붓는다. 삼성의 경우 1억 6천만불에 그치고 있다.

일본과의 다소 이상한 경제 전쟁이 진행 중이다. 한국은 1965년 국교 수립 이후 단 한 번도 일본에 무역흑자를 이룬 적이 없다. 반면, 한국을 통해 일본은 짭짤한 무역 흑자(3위)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 일본이 한국을 대상으로 수출규제를 하고 있다.

누군가 그랬다. “피 한 방울 안 적시고 전부 다 이길 수 있는 외교는 없다.” 또한 “최고의 외교정책은 국민적 합의다.” 그 누군가의 말에 공감하는 시기가 왔다. 사분오열하지 말고 도광양회하자.

연애에서 차인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복수는 자기관리 잘하고 상대방 흔적을 지우며 더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복수는 일본보다 더 잘사는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것이다.

필자의 부친은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현재 제주도에서 거주하신다. 일본에서 출생해 해방 후 12살이 되던 해, 한국에 귀국하셨다. 조센징(朝鮮人)으로 살아왔던 차별과 왕따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신다. 귀국 후에는 한국말을 못 해 내 나라에서도 고초를 많이 겪으셨단다.

선거철이 되어 투표를 할 때 늘 많이 고민하신다. “나라가 없는 것은 아비 없는 자식이고 감옥이란다.” 그야말로 “나라 없는 설움”을 단단히 겪으신 분이다. 본인의 정치적 가치관과 국가의 안녕에서 심사숙고하셨다.

작년 광복절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독립기념관에 갔었다. 올해에는 많은 이들이 찾아올 것 같아 나중에 한적한 시기에 방문하려고 한다. 불타는 화재 현장에서 퇴근시간됐다고 불을 끄던 소방관이 집에 갈 수 없듯이 세상에는 이유를 막론하고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다.

“노인 한 명이 죽는 것은 서재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란 말이 있다. 광복절 때 부모님께 전화드리는 게 반드시 내가 해야 할 일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라는 제목의 영화가 있다. 아니다. 새로운 영화 제목을 만들고 싶다. “이 땅은 우리 선조들과 어르신들이 일구고 지켜낸 나라다.”

아버지가 보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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